안증회는 하나님께 왜 예배를 드려야 할까?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조사들은 샤머니즘 사상에 많이 빠져있었다. 주술과 점을 많이 믿었고, 심지어 집안의 뱀한테 팥죽 대접하던 민간 신앙도 있었는데, 이러한 신앙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더듬어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조상들은 대보름날 달보고도 절하고, 돌에다 절하며 복을 빌기도 하였고, 심지어 고목나무에다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은 민간 신을 섬기던 예배의식이었다. 이 같은 과거 민간에서 내려오던 신앙적인 사상들은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신앙의 대상을 삼지 않았다. 현세에 있어서도 복을 줄 수 없는 것들에게 복을 간구했었다.
그러나 우리를 지으시고 낳아주시고 호흡을 친히 주장하시어 영원세계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민간 신앙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살아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이다.
예배라는 말씀은 제사라는 말씀과 일치가 된다. 구약에서는 제사라고 표현, 신약에서는 예배라고 표현. 예배를 드리는 뜻을 영적인 측면에서 찾아보고 알아보자.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주기 위함이시다.
잃어버렸다라고 말씀하신 이 대상자들은 누구에게 어떠한 의식을 행하는 자들인가?
안증회가 잃어버린 자의 존재인가?
요4: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데, 이는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결단코 구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다고 하셨는데, 찾고자 하는 대상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다. 그리고 안증회가 잃어버린 자이다.
그럼 이 지상에 하나님께 무조건 예배만 드리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일찌기 아벨의 예배와 가인의 예배를 통해서 누가 구원을 받게 될지 알려주셨다.
아벨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자기의 사견을 집어 넣어서 예배를 드렸다.
모두가 똑 같이 하나님 이름을 불렀지만 하나님께서 받아들이는 예배가 있었고, 거절한 예배가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안식일과 삼일 예배및 3차 7개 절기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가인과 같은 예배를 드린고로 그 예물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기뻐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렇다면 안식일 예배 못 드리는 자 구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유월절 예배 못 드리는 자, 결단코 천국 갈 수 없다.
예배가 우리-안증회를 복되게 만드는 것이다.
성부 시대에 예배드린 자 중에 축복 받은 장면을 보자
왕상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솔로몬은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고 이끌어 갈지 하나님께 축복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먼저 드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바라는 것을 말하라고 하니 솔로몬은 많은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허락해 달라고 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가 기쁜 연고로 지혜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도 허락해 주셨다.
그 소망이 하나님께 기쁨과 감동을 드렸기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 흡족히 내리셨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솔로몬 왕조 시대가 최고의 전성기였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내 힘으로 하려면 잘 안 되는 일이 많다.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 자비와 축복을 구하고 아뢰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다.
어려움 있을 때마다 예배 제단을 쌓아보자.
하나님 규례 예배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기도의 제단을 쌓아보라. 반드시 어느 날엔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운 축복이 찾아 올 것이다.
솔로몬 뿐만아니라 솔로몬 왕조 이전 시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 시대를 보자.
예배는 내 생각대로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 뜻에 따라서 드리는 예배가 온전한 예배임을 여기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창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제물을 독자 이삭으로 사용하라고 하시는 장면이다.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니까 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끝까지 따르겠노라 하며 발길을 모리아 산으로 옮겼다.
창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독자 이삭까지 바칠 정도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를 중시 여겼다.
이러한 입장에서도 예배를 소홀히 아니한 아브라함이었기에 어떤 축복을 주시는가?
창22:14 .........네가 이 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결국 아브라함에게 축복 주시길 '네게 복을 비는 자에게 복을 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들은 저주하리라. 또 네 씨를 많게 해 줄 것이다'라고 복을 내리신 역사를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예배만큼은 결단코 소홀히 아니한 결과 솔로몬과 아브라함은 엄청난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로 일관되어 있다. 기도는 예배의 한 의식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난제들이 쌓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을 줄 알아야겠다. 단 오 분 간이라도 기도하고 찬송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무장시켜볼 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과 아브라함에 내리신 축복을 우리에게도 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십사만사천은 무엇을 잘 지키는 자라고 했는가?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모두 다 예배이다.
안증회가 예배를 드리는 이유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만드셨을까?
고전8: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하지 않게 될 때에는 틀림없이 돌이나 나무에게 복달라고 절하고 해나 달을 보고 절하게 될 것이다.
인도의 어떤 사람은 뱀을 숭배한다고 하는데, 뱀을 숭배하는 교주가 20년 만에 자기가 숭배하던 뱀에게 물려죽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이상한 것들에게 절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게 될 때는 반드시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 있다.
다른 신들을 섬겨가지고는 결국은 멸망하게 됨으로 멸망치 아니하고 은혜롭고 행복한 은혜의 동산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다.
돌을 숭배하는 자들보다도 얼마나 지혜롭고 축복된 자들인가. 그러니 어느 한 예배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발해주신다. 영적으로 치유시켜주기 위해서 오라고 하신 것이다.
너무 긴 공백 기간을 예배시간으로 두면 우리 영혼은 다른 신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에게 찬송과 영광 안 받으신다고 해서 하나님 명예에 손상되는 일이 없다.
이 모든 일이 결국은 우리를 위한 일들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영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
갖가지 세상의 못된 악습과 생각을 다 물리치기 위해서 이 시간 오라고 하신 것이다.
예배를 다시 한 번 더 중시 여겨서 예배시간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마음을 받쳐야 한다.
더 많은 예배 속에서 솔로몬과 같이 축복받고 아브라함과 같이 축복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