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2일 토요일

안증회에서 증거하는 십자가

십자가를 세우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절하지 않으며 그것을 섬기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도 오랫동안 개신교를 다녀봤지만 십자가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십자가를 예배당에 걸어두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하면 어김djqt이 돌아오는 대답이 있다.

“우리는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이란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볼 때마다 되새긴다는 말이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셨으니 그것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하니, 정말 아무 생각없이 듣기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제정신을 차리고 들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과연 ‘숭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개신교인들이 따르는 장 칼뱅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보자. -안증회에서 찾는 하나님의 진리는?




***********************************************************************************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한 생각에 물들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그들은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彫像-조각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를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떠한 봉헌도 금하셨던 것이다. (중략)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는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략)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엄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 (중략)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1장)
       ***********************************************************************************

장 칼뱅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드는 즉시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단언했다. 더욱이 ‘어떤 형상에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결국 십자가 형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개신교인들은 그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고 있다는 얘기다. 칼뱅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단언했다.

십자가를 세우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든 행위는 우상숭배다. 개신교인들이 우상숭배자라고 치부하는 불교인도 결코 불상을 부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처를 공경하는 하나의 도구로 여긴다. 부처를 세우는 불교나 십자가를 세우는 개신교나 매한가지란 얘기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하며 십자가를 차 안에, 집 안에 달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의미한다며 굳이 예배당과 교회 꼭대기에 세우면서 “우리는 그 앞에 절하지 않으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다”고 변명하는지 답답할 노릇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도 말며 섬기지도 말라”고 하셨다(출애굽기 20:4~5).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우상숭배 행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지 않으면 된다. -안증회에서 찾는 진리

출처: 패스티브닷컴-안증회

댓글 없음:

댓글 쓰기